작품의 빈틈을 채우는 배우가 있다. 짧은 등장만으로 인물의 삶을 설득하고 극의 분위기를 단단하게 붙드는 배우다. 연극 무대에서 연기의 기본기를 쌓아 영화와 드라마로 활동 영역을 넓혀 온 정현석이 그런 연기자로 주목받고 있다.
정현석은 춘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 법학과에서 수학했다. 대학 시절부터 연극에 관심을 보인 그는 공연창작집단 ‘뛰다’에서 2005년부터 2009년까지 정단원으로 활동하며 배우의 길을 본격적으로 걸었다.
공연창작집단 뛰다는 배우의 신체와 소리, 오브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창작 작업으로 알려진 극단이다. 정현석은 이곳에서 다양한 공연 제작 과정에 참여하며 현장 경험을 쌓았다. 대사에만 의존하지 않고 몸짓과 호흡, 상대 배우와의 교감을 통해 인물을 표현하는 무대 연기의 기초도 다졌다.
대표적인 출연작은 ‘하륵이야기’다. 정현석은 이 작품에서 악사장 역을 맡아 연기와 음악이 어우러지는 무대를 선보였다. ‘노래하듯이 햄릿’에서는 앙짜 역으로 출연했고, ‘커다란 책 속 이야기가 고슬고슬’, ‘그림자 그림자’, ‘할머니의 그림자 상자’, ‘앨리스 프로젝트’ 등 공연창작집단 뛰다의 주요 레퍼토리에 참여했다.
공연마다 표현 방식은 달랐다. 때로는 대사보다 움직임이 중요했고, 때로는 음악과 오브제, 배우들의 앙상블이 극을 이끌었다. 이러한 경험은 정현석이 특정 장르나 인물에 갇히지 않고 작품의 요구에 맞춰 연기의 크기와 결을 조절하는 바탕이 됐다.
무대에서 축적한 내공은 방송에서도 이어졌다. SBS 드라마 ‘잘 키운 딸 하나’에서는 이 대리 역을 맡았고, ‘피고인’에서는 김 교도 역으로 출연했다. ‘흉부외과-심장을 훔친 의사들’에서는 유세환 역을 연기하며 극의 현실감을 높였다.
정현석의 강점은 인물을 과장하지 않는 데 있다. 대사를 힘주어 전달하기보다 표정과 시선, 말의 속도와 침묵을 활용해 인물의 상황을 드러낸다. 주어진 분량 안에서 캐릭터의 직업과 성격, 관계를 빠르게 구축하는 것도 그의 장점이다.
2025년 개봉한 영화 ‘신명’에서는 신부 역으로 관객과 만났다. ‘신명’은 주술과 권력이 얽힌 이야기를 다룬 오컬트 정치 스릴러로, 정현석은 절제된 연기를 통해 작품의 긴장감을 뒷받침했다. 연극 무대에서 익힌 안정적인 발성과 집중력이 스크린에서도 자연스럽게 드러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정현석의 연기 행보는 단숨에 스타가 되는 길과는 거리가 있다. 대신 여러 무대와 촬영 현장을 거치며 한 장면을 책임질 수 있는 배우로 성장해 왔다. 긴 시간 현장을 지키며 쌓은 경험은 배역의 크기와 관계없이 작품 전체를 바라보는 힘으로 이어지고 있다.
연극에서 출발해 드라마와 영화로 활동 무대를 넓힌 정현석. 눈에 띄기 위한 연기보다 작품에 필요한 연기를 선택해 온 그의 강점은 묵직한 신뢰감이다. 새로운 얼굴을 필요로 하는 한국 영상 콘텐츠 현장에서 탄탄한 기본기와 폭넓은 현장 경험을 갖춘 정현석의 다음 행보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