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을 지낸 이해찬 전 국무총리가 25일(현지시간) 베트남 출장 중 별세했다. 1952년 충남 청양 출생으로 향년 74세다. 이 전 총리는 23일(현지시간) 심근경색 증상을 보이며 쓰러져 현지 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오후 2시 48분 숨을 거뒀다.
고인의 삶은 한국 현대 정치사의 축약이었다. 1988년 평화민주당 입당 이후 40여년 동안 민주당 계열 정당의 주요 국면마다 중심에 섰다. 고인은 민주 진영이 배출한 네 명의 대통령과 깊은 정치적 인연을 맺었고, 그 관계의 축적은 곧 집권사의 골격이 됐다. 전략과 판세 분석에 강점이 뚜렷해 여권 내 최고 전략가로 평가받았다.
청양면장 출신 부친 아래서 성장한 고인은 덕수중·용산고를 거쳐 1971년 서울대 섬유공학과에 입학했다가 사회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자퇴했다. 이듬해 서울대 사회학과로 재입학한 뒤 학생운동에 투신했고,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중형을 선고받았다가 형집행정지로 출소했다. 이후 서점을 열고 출판사 돌베개를 창업하는 등 현장과 사상을 잇는 삶을 이어갔다.
1980년대 초 복학 후 신군부 시기 정치 격랑 속에서 고인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비판적 거리를 유지했으나,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재판 과정에서 고인의 인식은 전환됐다. 14년에 걸친 학업을 마친 1985년 이후 정계 진출의 길이 열렸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 서울 관악을에 출마해 당선되며 국회에 입성했고, 5공 청문회에서의 송곳 질의로 존재감을 각인했다.
선거 기획가로서의 면모는 1997년 대선에서 두드러졌다. 인구 구조와 세대별 성향을 토대로 판을 짜는 능력은 김대중의 신뢰를 얻었다. 집권 후 고인은 만 45세에 교육부 장관으로 발탁돼 대입 무시험 전형, 전교조 합법화 등 굵직한 개혁을 추진했다. 논란과 비판 속에서도 정책 방향을 밀어붙인 시기였다.
고인의 정치 인생에서 가장 뜨거운 장면은 노무현 정부와 함께한 시간이었다. 노무현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지내며 ‘책임 총리’의 위상을 구축했고, 직설적 화법과 강경한 태도로 ‘버럭 해찬’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이는 정치적 계산의 산물이었다는 회고도 남겼다.
당 대표 시절에는 ‘시스템 공천’을 앞세워 2020년 21대 총선에서 민주당의 압승을 이끌었다. 고인은 성과로서 의석 수보다 당의 구조적 변화에 의미를 뒀다. 전 당원 온라인 투표 시스템 구축, 권리당원 의사 반영 확대 등은 이후 민주당 의사결정의 핵심 제도로 자리 잡았다.
고인의 마지막 정치적 프로젝트는 이재명 정부의 탄생이었다. 성남시장 시절부터 정치적 멘토로서 관계를 맺었고, 당내 논란과 위기 국면마다 방패막 역할을 했다. 2021년 민주평화광장의 출범과 외곽 조직 재편은 이른바 ‘이재명 대세론’의 분기점으로 평가된다.
민주 진영의 독보적 킹메이커라는 평가는 여야를 가리지 않는다. 1997년 김대중, 2002년 노무현, 2017년 문재인 대선 승리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맡았다. 지난해 대선에서는 건강 문제로 전면에 나서지 못했으나, 영향력은 여전히 컸다.
고인은 말년 건강 악화로 투병해 왔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정옥씨와 딸 현주씨가 있다. 고인의 시신은 26일 밤 베트남에서 출발해 27일 새벽 인천공항에 도착한 뒤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으로 옮겨질 예정이다. 장례는 국가장으로 치르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역사의 큰 스승을 잃었다”며 애도의 뜻을 밝혔다. 민주주의와 평화, 균형발전을 향한 고인의 정치적 유산은 한국 정치의 제도와 구조 속에 깊게 남았다.